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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짧은 학력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피해의식 속에서 삶을 돌이켜 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피해의식에 대해서 위키 백과는, 자신을 타인의 부정적인 행동의 피해자로 인식하고, 이런 상황과는 반대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획득 성격 특성(acquired personality trait)이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나쁜 영향만 주지는 않았습니다.
애석하게도 그것 저의 삶의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아침 우연히 보게된 짱구는 못 말려 : 어른제국의 역습 편에 히로시의 회상이라는 이름으로 된 영상으로 피해의식부터 시작해 저도 과거로 돌아가는 여행을 잠시 하게 되네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아주 어릴 적 기억
사람들은 나쁜 기억은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순간순간 의식하지 않아도 기억되지만, 좋은 기억은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야지만 기억할 수 있다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이 먼저 올라오네요 ㅠㅠ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그러니까 저는 국민학교이네요 그 시절 나에게 재능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선생님이 인정하고 찾고, 친구들은 나라는 사람을 보면 반갑게 아는 척해주는 것의 행복을 알던 시절에 저의 피해의식은 처음 생겨난 것 같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아이들을 모아 합창부를 만들었고 그 합창부는 그냥 학급이 된 그 반 '6학년 13반' 담임 선생님의 미소와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하는 아이들만 모여 있던 그 반...!
그렇게 모여 있으니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에 따라 이런 차이를 보이는 구나를 그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고 합창부 단원 옷을 구입하기 위해서 회비 같은 것을 걷었는데 그 회비조차 어머니에게 말하는 것이 미안했던 기억으로 피해의식은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시작되어 버렸습니다.
'친구들 보다 열심히 노래해야지...'
'친구들 보다 더 밝게 지내야지...'
'그래서 친구들 보다 선생님과 많이 시간을 보내야지...'
저의 당시 삶의 원동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는 양재역 근처 도곡동에 소재한 언주국민학교입니다.
아!!! 언주초등학교라고 해야 하는데 저의 기억 속에 학교라 자꾸만 국민학교라는 말이 나오네요
학교 사진을 올리려고 찾아보니 이제는 바뀐 지금의 모습에 사진만 있어서 찾다가 제일 저의 기억과 비슷해서 선택한 사진입니다.
사진 왼쪽 벽부터 아래 길까지 내리막인데 쫙 무궁화가 피어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이 근처를 지나가게 되면 자꾸만 눈물이 나서 일부러 피해 가거나 멀리 돌아가거나 하게 되는데 저의 마음속에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겠죠!!
중학교 시절
중학교 3학년 아버지를 모셔 오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처음 아버지가 제가 다니는 학교를 방문하셨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도 혼자 하고 다른 친구들은 가족들끼리 모여서 양재동에 정말 유명했던 중국집 연성루의 맛있는 식사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혼자 구석에 작은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500원짜리 짜장면을 뚝딱 해치우고 당당하게 계산하고 나왔던 상황을 생각해보면 참 웃프다고 해야 하나? 그 당시 친구 가족이 옆 테이블에 있었는데 친구 어머니가 같이 먹자고 하신 권유를 괜찮다며 난 혼자 잘 먹는다고 하면서 먹고 먼저 일어났던 때, '나보다 더 어려운 아이들은 짜장면도 못 먹어, 나는 그래도 짜장면 먹잖아!!!'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고 집으로 돌아왔었습니다.
그때 또 그런 마음은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해보면 피해의식의 힘으로 그런 행동과 말과 생각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 아이가 아버지를 모시고 학교로 가는 그 마음은 참 뭐라고 해야 할지ㅠㅠ, 담임 선생님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통상적으로 하는 그냥 면담이었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까지 한 그런 자리에서 담임 선생님의 여러 말씀 중에 딱 하나 명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버님 이 성적으로는 고등학교 못 갑니다.'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웃기만 하시고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알았다고만 하시고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먼저 앞장서서 가시는 아버지의 뒤를 조금의 거리를 두고 걸어갈 때 마음은 참 ㅠㅠ,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뒤 돌아보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짜장면 먹고 가자! 배고프다'
아버지는 본인의 아들의 상태 때문에 분명 허기가 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아이에게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전혀 모르셨기 때문에 더 허기가 지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짜장면을 먹자고 하셨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둘이서 짜장면 각각 한 그릇식 먹고 자리에 일어나면서 '이제 집에 가자' 하시고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사실 창피했습니다.
너무나 많이... 내일 학교에 가서 선생님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정말 난감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면담을 했을 텐데 친구들은 어떻게 보지? 하는 생각에 복잡하기만 했고, 당시 치맛바람이 강했던 동네에서 친구들은 교실에서 쉴 때 나와 몇몇 아이들은 새로 생긴 학교의 운동장 돌을 주어야 했고, 테니스장의 아주 큰 롤러를 밀어야만 했었기에 더더욱 친구들과의 차이가 더 멀게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중 3 잠시 공부를 하고 성적을 끌어올리고 저는 고등학교를 입학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서 저의 마지막 모의고사의 성정을 보시고 저를 희한하게 바라보시던 눈빛이 기억이 납니다.
뭐 암튼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담임은 못 간다고 했지만 갔습니다.
다만 학교가 ㅠㅠ..
당시에 전수학교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성적도 안되고, 문제만 일으키는 아이들이 고등학교는 나와야 뭘 해도 한다는 그런 이상한 기준으로 자퇴 대신 선택하는 학교가 전수학교입니다.
학교 이름은 모릅니다.
그냥 전수학교라고 부릅니다.
사실 저는 성적이 엉망이었기에 진학을 하려면 돈을 조금 써서 입학했어야만 하는 학교 전수학교를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잠시 공부하여 성적을 끌어올려 어머니가 공고나 상고를 가서 취업을 해라 했던 것을 아버지가 안된다며 아들은 인문계를 보내야 한다고 해서 그냥 남들 다하는 당시 뺑뺑이로 선택된 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사실 말로만 뺑뺑이지 지금보다도 더 비리가 많았던 세상에서 뺑뺑이가 어디 있어요!! 뭔가 힘이 있으면 원하는 학교로 진학할 사람은 다 하는 그런 세상이었다는 것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다 알고 있던 것인데...
저는 상문 고등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비리의 온상 상문 고등학교, 고등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학교 담장 높이가 2미터 이상에 철조망에 깨진 유리도 밖에 놓는 학교, 졸업생들이 몰려와 학교를 살려야 한다며 비리에서 구해내야 한다면서 우르르 몰려와 비상이 걸렸던 학교, 바로 그 유명한 두사부일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학교, 교장 선생이 학생들의 머릿수를 돈으로만 생각했던 학교를 다녔던 것이죠, 이 내용은 다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이 이런 모습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제가 졸업할 때 담임선생님이 여러 가지 돈을 걷었는데 바로 후배들을 위한 시계탑 건설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왜 내야 하는지, 정확히는 그 돈까지 내기도 어려웠고 내기도 싫었었는데 이유는 간단 합니다.
제가 살던 집 앞에 한 학년 형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죠, '나도 돈 냈어 그런데 시계탑은 없네...' 이런 말을 말이죠 ㅠㅠ
하지만 그 돈을 내지 않으면 졸업앨범을 주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뭐 저도 냈습니다. ㅠㅠ
이런 돈이면 다되는 학교에서 저에게 이미 생겨버린 피해의식은 더 커 저만 갔었습니다.
혹시 '듀스'라는 힙합 그룹을 아시나요? 이 둘이 저와 동기인데 애석하게 김성재는 하늘나라로 갔죠!!
상문 고등학교는 스포츠머리로 모두 깎아야 하는 교칙이 있는 학교였는데 이상하게 반마다 거의 한명식 머리 긴 친구가 있었습니다.
네!! 그 친구가 가진 친구들입니다.
제 반에 있었던 친구는 이름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머리가 자라지 않는 병에 걸렸다며 선생님이 설명해 주시는데, 속으로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머리 자라는 것 그리고 이발소에 가는 것 다 봤는데, 그 김성재라는 친구도 반마다 있었던 가진 자의 아이였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피해의식 덩어리로 커져갔습니다.
히로시의 회상
역시 저의 이야기를 한 게시 글로 적기에는 너무 긴 사연인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그렇게 했던 사람이 대학진학도 잘했을 리 없습니다.
반에서 꼴등도 하고, 담임 선생님이 저에 대한 대학 진학을 포기한 상태에서 아버지께서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라는 말씀에 고3 2학기 그리고 재수해서 전문대로 진학을 합니다.
물론 4년제를 목표를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걸리면 다니는 것이고 아니면 나는 전문대가 목표니까 하는 생각으로 재수를 준비했습니다.
저때는 전기, 후기, 전문대 순으로 진학을 할 수 있었는데, 참 웃기죠 대학의 수준을 정한 거예요 전기에 해당하는 학교 후기에 해당하는 학교, 하긴 전수학교도 있었던 시절인데...
저의 대학 입학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고3 때 대학 도전기에 전기는 예비합격자 명단에, 후기는 합격 그러나 전기 학교에서 미달로 인한 예비합격이 합격으로 바뀌면서 등록처리를 미루는 바람에 이중합격 둘 다 떨어짐 ㅠㅠ, 그렇게 힘든 마음에 전문대 시험은 보지도 않고 떨어짐 그렇게 재수에 도전 !!!, 전기는 유례없는 쉬운 문제로 커트라인 상승으로 탈락, 후기는 멀리 강원도 까지 가서 예비소집을 했는데 시험지 유출 사건으로 일정이 틀어져 시험 치르지 않아 탈락, 마지막 전문대는 떨리는 마음에 죽어라 열심히 해서 붙었네요!! 저의 대학 진학기 어떤가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기도 하고 대학 진학은 운이 80이다 이런 말이 있었는데 딱 그런 모습을 보냈네요 ㅠㅠ
그리고 이어지는 회사 생활!! 전문대라는 이유로 지들이 뽑아 놓고 나중에 입사하는 4년제 후배의 월급이 선배인 저보다 많아 매번 불평이 많았던 초창기 시절, '내가 니들 보다 일은 잘해 월급 많이 받았으면 돈 값을 해!!'라는 마음으로 난 저들 보다 실력이 좋아요를 시전 하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던 것도 저의 피해의식이 한몫을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유롭지 못했던 어린 시절과 1994년 12월부터 시작한 회사 생활 그 피해의식이 아이러니하게 선한 원동력으로 작용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온 것 같습니다.
뭐 제가 대단한 위치는 아니고요, 대한민국에서 빌라지만 집하나, 아내, 딸과 아들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 피해의식이 원래 좋은 감정은 아니기에 결국 저에게 쌓여있었던 문제가 지금은 곪아 터진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남겼던 글인데 '한 시대의 원동력이 다음 시대에서 발목을 잡는다'라는 말 있죠? 그렇습니다. 지금 저의 발목을 잡고 있고 이제는 태울 것이 없는 그런 연료통 속 남은 가스로 Over Burnning 중이라 앞으로의 삶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할 시기하는 놈이 저의 팔을 잡고 흔들고 있습니다.
그런 감정에서 히로시의 회상 영상은 저를 힘들게도 그리고 감정에 힘을 주기도 하네요!!
막 울고 싶을 때 그러나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 일부러 슬픈 것을 찾아보는데 오늘은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들어와 버렸네요!!
너무 길게 글을 적었습니다 ㅠㅠ
지금까지 글을 오래 적어 힘들었던, 글쓴이 하늘항아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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